밑줄 긋는 방법

지하

햇살이 벽을 통과하지 않는 어둑한 건물. 일 층 뒤쪽 벽에는 각각 지하로 이어지는 문과 이 층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 중앙에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은 불안이다. 앞에 놓인 탁자도 수평이 맞지 않아 덜컹거린다. 지하 계단에서 습기가 올라온다. 계단에 발을 비스듬히 올려놓고 손잡이를 잡는다. 철제 손잡이는 녹이 드문드문 슬었다.

불안의 발소리에 외로움이 몰려온다.

외로우면 부르지 그랬어

불렀어

(잠시 정적)

못 들었는데

작게 불렀거든

크게 부르지

크게 부르는 법을 몰라서

불안은 궁금한 게 많다.

내가 부르는 소리는 못 들었어?

들었어

왜 안 올라왔어?

길을 몰라서

길은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만 있는 줄 몰라서

또 오지랖이 넓다.

우리가 같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외롭진 않겠지

2층에는 슬픔이 산대, 같이 갈까?

길을 알아?

길은 하나 밖에 없는데

하나 밖에 없는 줄 몰라서

또 걱정이 많다.

우리가 슬픔에게 가면 도움이 될까?

외롭진 않겠지

올라가는 길

이 층으로 올라간다. 계단은 지하보단 녹이 덜 하지만 먼지가 쌓여 있다.

외로움이 말한다.

정말로 길이 하나 뿐이네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네

나는 크게 부르는 법을 몰랐어

나는 길을 몰랐어

내가 외로운 이유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어

불안이 말한다.

난 궁금한 게 많고, 오지랖이 넓어서

무엇이든 물어보고 무엇이든 알았는데

딱 하나를 몰랐어

외로움이 외롭다는 것을

2층

세로로 길다란 판자가 덕지덕지 달린 나무 문이다. 불안이 자세를 낮춰 허리 높이의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문이 삐걱이며 열린다.

우리는 불안이랑 외로움이야, 너를 만나러 왔어

누가 나를 먼저 찾아온 건 처음이야

뭐하고 있었니?

슬퍼하고 있었지

불안과 외로움이 눈을 맞춘다.

지금도 슬프니

슬퍼

우리가 왔는데도?

너희 둘을 보니까 알겠어, 내가 진짜 혼자였다는 걸

이제는 우리가 같이 있을게

고마워, 근데 왜 눈물이 안 멈추는 지 모르겠어

아무말 안하던 외로움이 말했다.

안다는 건 슬픈거야

아직 2층

우리 3층으로 가자. 외로움이 말했다. 둘이 망설일 정도로 이곳은 아늑하다.

3층엔 누가 있는지 몰라

불안의 대답을 듣고 외로움이 말했다.

그건 올라가면 알 수 있겠지

순간 창가에서 싸늘한 바람이 스며들어온다. 문에 달린 판자가 흔들린다. 슬픔이 흐트러진 자세를 여민다.

3층

슬픔이 주저앉았다.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

외로움이 슬픔에게 다가갔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같이 가자

불안은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리고 슬픔에게 내비칠 수 없어 주먹을 쥐었다.

3층은 문도 초인종도 없이 뻥 뚫려 있었다.

누구 있어요

외로움이 소리쳤다.

거친 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실루엣이 비치자 셋은 말하지 않아도 그를 알아차렸다.

후회는 웅크려 있었다.

안녕? 우리는 불안과 외로움과 슬픔이야

넌 누구니?

후회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듯 하다.

슬픔은 눈가를 닦고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

후회에게 눈물이 닿자 슬픔이 몰려왔다.

외로움은 후회의 어깨를 안았다.

불안은 후회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굳어버린 후회는 슬픔에게 기대어 일어났다.

복도

불안이 슬픔에게 말했다. 우리 잠깐 앉아서 쉴까?

누군가 쉬자고 한 것도 처음이야. 그래도 될까?

물론

후회의 숨소리만 들렸다.

끝 없는 복도

가도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말했다.

길을 잘못 든 걸까?

길은 하나 밖에 없어

외로움이 작게 말했다.

불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외로움은 나와 다른 걸 알고 있구나

공터

뻥 뚫린 공터에는 원망이 살고 있다.

턱을 들어 하늘을 향해 모두를 원망하고 있었다.

넷은 풍경에 압도되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우리는 불안 외로움 슬픔 후회야

다들 자기 살기 바쁘구나

자신을 챙기는 거야

너희들은 왜 같이 있니

모르는 걸 알기 위해서야

불안이 원망에게 말했다.

원망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다가왔다.

이런 우리가 밉니

슬픔이 물었다.

난 내가 미워

우리가 너에 대해 알려줄게

나에 대해 잘 알아?

천천히 알게 될 거야

슬픔은 이 말을 하며 혼자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맞은편 쉼터

쉼터에는 긴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잠자코 있던 후회가 여러 호흡에 걸쳐 말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가도 결국 숨은 붙어 있어, 그렇지?

좋은 것만 가지고 가기에는 우리가 가진 주머니는 턱없이 작아.

관계란 생명줄이어야 하는데 왜 다들 마음 속에 칼을 품고 다니는지.

주머니 속도 모르고 다 가져 가다가는 아무도 모를 공터에서 쓰러질 거야….

음성과 바람 소리만 들릴뿐이다.

다시 공터

넓은 공터에서 딱히 가야 할 길은 없다. 외로움이 긴 침묵을 깼다.

우리 저기로 가자

가리키는 곳은 드넓은 밀밭이 보이는 수평선이다.

저기는 길이 없어

가면 길을 잃을 게 분명해

불안과 원망이 동시에 말했다.

저기가 그나마 밝은 곳이야

외로움이 말했다.

모두의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후회가 뒤를 돌아보았다.

후회될까?

슬픔이 말했다.

가보자

밀밭

안개가 자욱한 길에 마른 가지가 무성하다. 밀밭의 계절은 생명들의 기대에 따른다.

불안은 까마귀가 우는 소리에 이따금 놀란다.

원망이 말했다.

공터가 좋았어, 그렇지?

모두가 말을 삼킨 채 수평선을 향해 비스듬히 걸었다.

수풀이 바람에 움직인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니

나무들 사이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린다.

어디로 가니, 같이 가도 될까?

작은 바위에 몸을 숨긴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린 불안 외로움 슬픔 후회 원망이야

나는 질투야

외로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투가 말했다.

숲 속으로

밀밭의 붉은 세 갈래 길 아래에서. 숲은 곳곳이 나무가 솟아 있어 미로와 같은 인상을 준다.

주저하지 않고 가장 밝은 쪽으로 향한다.

허리춤의 밀은 어느새 숲을 이루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원망이 외로움에게 말했다.

후회는 슬픔을 흘긋 보았다.

불안은 질투의 시선을 느꼈다.

가자며 무슨 말이야

질투가 말했다.

우린 수평선을 넘어가기로 했어

수평선은 넘을 수 없어 그저 바라보는 거야

그루터기 위에서

나뭇가지가 하늘을 채웠다.

후회는 그림자가 질 때가 그나마 따뜻했음을 깨달았다.

저 검은색은 뭐지

불안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직전에 울던 까마귀 무리 중 하나다.

꺾인 밀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슬픔이 자욱 길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이 몸을 떨며 털썩 주저 앉았다.

질투는 못 볼 걸 봤다는듯 눈을 피했다.

그리고 원망이 다가갔다.

그루터기 위에 까마귀를 올려두었다.

마른 잎을 덮고 주변에 나뭇가지를 세웠다.

이렇게라도 하는 게 어때

원망이 말했다.

비탈길 

가파른 내리막이다. 비탈은 위에서 아래로 빛에서 어둠으로 흐른다. 그림자마저 축 쳐져 등을 떠민다. 대부분의 ‘가야할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 오르막과 평지이지만, 비탈길은 선형적이다. 하나로 이어지고 하나의 결과를 바라며 뚝 떨어진다. 비탈의 짙은 모래는 바람에 부딪히며, 나그네의 발에 이끌리며 끊임없이 내려가며 또 다른 비탈을 만들었을 것이다.

불안과 슬픔이 후회를 부축한다.

질투가 말한다.

뭐라고 이렇게 도와주는거야

길들이기 위해서야

외로움이 말했다.

바닥에서 밀 씨앗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다시 쉼터

그루터기가 여러 개 있다.

공터보다는 차갑고 좁은 곳이다.

여기 앉아서 쉬자

슬픔은 이 말을 하며 생각했다.

우리에게 잠시 쉴 곳이야

원망은 내가 알지 못하는 걸 이해했구나

자갈길

가도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질투는 속으로 생각했다.

길들인다는 건 뭘까.

늘어진 자갈이 갈 길을 붙잡는다.

어스름 속

숲 속은 안개가 자욱해졌다. 저 멀리서 가지가 움직인다. 어스름은 땅에 가까이 붙어 선망보다는 위협으로 다가온다. 만지지 못하는 구름보다 차갑게 떠오르고 깔리기를 반복한다.

슬픔은 이유를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원망이 앞을 경계하며 말했다.

누구야

그대로 둬

슬픔이 말했다.

그리움이 다가왔다.

들판

안개가 걷히고 길이 사라졌다.

들판은 어스름의 흔적이 그득하다.

불안과 질투가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움과 후회는 넋을 놓고 둘을 바라보았다.

외로움은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슬픔은 눈물을 다시 닦았다.

공터보다 따듯한 곳이야

원망이 턱을 들어올리며 생각했다.

작은 언덕

한 눈에 보이는 하늘과 들판이 푸르다.

질투가 손짓하자 모두가 언덕 위에 올라섰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돌아가는 길

어지러운 숲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주춤거리는 발걸음, 더디게 가는 시간을 뿌연 하늘을 보며 탓한다. 누구 탓도 할 수 없으면 하늘을 보게 된다. 감색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날씨를 원망하고,

비에 갇혀 외로워하고,

돌아가는데에 불안하고,

어둑하고 축축해 슬퍼하고,

여기까지 온 것에 후회하고,

조금 전까지 환하게 비추던 태양을 질투하고,

다시 그리워한다.

나무 아래

빗방울이 거칠어지기 전에 커다란 잎사귀 아래에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운데 미약한 따스함이 감돈다.

외로움이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물 웅덩이

물 웅덩이. 별빛이 아래에서 반짝인다.

모든 게 변하지 못해 녹슬고 있는 풍경이다.

불안이 녹을 떠올리면서 손을 만진다.

녹은 가만히, 오래, 영원히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을 때 생긴다.

신기루

언덕 올라가는 길. 지옥은 감정이 없는 곳이다. 모든 감정이 산화해버린 곳. 부스러기가 되어 더 이상 끝은 없다고 생각할 때 환상같은 게 보인다. 그리움이 갑자기 돌아선다.

너에게는 안정이,

너에게는 채움이,

너에게는 기쁨이,

너에게는 소중함이,

너에게는 감사함이,

너에게는 넉넉함이 남기를.

하나하나 그리운듯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박정견